독서/한달서평9기(20.09.17~10.16)

DAY24_[말센스]_01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낸다

휘바영감 2020. 10. 10. 22:22


흥분하지 않고 우아하게 리드하는

말센스

 

01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낸다

 

우리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 보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바쁘다.
상대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나와 결부시켜 얘기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상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나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내가 주인공이지만, 상대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상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슬픔에 빠져 취약해진 사람에게 적절한 말이 무엇일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저서의 필자는 자신이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9개월 밖에 안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잠수함에서 익사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음에도 항상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했다고 말했다. 그저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슷한 일을 겪어 봤기 때문에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마치자 마자 그 친구는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좋아, 셀레스트 네가 이겼어. 너는 아버지를 알지도 못했지만, 나는 아버지와 최소 30년 이상을 함께 보냈으니, 네 상황이 더 안 좋은 거야. 그러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가 기분 상할 필요는 없겠지."

 

셀레스트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보인 반응은 자신의 태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아냐, 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절대 아냐. 나는 그저 네 기분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아냐, 셀레스트, 너는 이해 못해. 너는 내 기분을 조금도 몰라."

 

그녀는 자리를 떴고, 나 셀레스트는 그곳에 무기력하게 서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보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완전히 실망시키고 말았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위로는 커녕 기분을 더 상하게 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친구가 나를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취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주려던 나를 부당하게 몰아세운 것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친구는 나를 오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시 일어났던 일을 나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가 자신의 슬픔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기 시작했을 때, 그 상황을 불편하게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주제, 즉 나 잔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적어도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내가 그녀와 공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내가 행한 건, 그녀의 고통에서 관심을 끌어와 나에게 집중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고, 내게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친구와 나눔으로써 상실감을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 커녕, 내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상실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내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로 맞받아쳤는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보이스카웃에서 한 아이와 다툰 이야기를 하면,
나는 대학 시절 나와 불화를 겪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동료가 해고를 당하면,
나는 그에게 과거 직장에서 쫓겨났을 당시 직업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야기해주곤 했다.

 

하지만 내 경험을 공유하는 행위가 의도와는 달리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면서 자신의 경험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인정해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공감이다

 

대화 나르시시즘

사회학자인 찰스 더버의 이론으로 대화 속에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성향을 말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대화를 이끌면서, 대화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고자하는 욕망으로, 스스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더버는 대화 나르시시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화 나르시시즘은 주목을 끌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배적인 심리 성향을 잘 나타내준다. 이 성향은 친구와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주로 모습을 두러낸다.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책들이 이야기를 얻는 것을 보면, 이런 성향이 일상생활 전반에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버는 이와 관련하여 대화 상황에서 나타나는 두 종류의 반응을 제시한다.
하나는 '전환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지지 반응'이다.

전환 반응은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고,
지지 반응은 관심을 상대에게 두는 것이다.

전환 반응 - 메리: 나 지금 너무 바빠/ 팀: 나도 지금 정말 정신없어.
지지 반응 - 메리: 나 지금 너무 바빠/ 팀: 왜? 해야 할 일이 많아?
전환 반응 - 카렌: 새 신발을 사야겠어/ 마크: 내 신발도 다 낡았어.
지지 반응 - 카렌: 새 신발을 사야겠어/ 마크: 그래? 어떤 신발을 사고 싶어?

 

전환 반응은 대화 나르시시즘의 주된 특징이다. 전환 반응은 관심의 초점을 끊임없이 자신을 향하도록 한다. 반대로 지지 반응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지 반응은 내가 지금 상대의 말을 듣고 있고, 계속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초점을 바꾸기 위한 자신의 시도를 매우 교묘하게 위장한다.

"잘됐네! 축하해. 나도 내 상사한테 승진시켜달라고 해볼 생각이야. 승진이 되었으면 좋겠네."

이런 태도는 상대로부터 계속해서 공을 뻬앗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상대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를 그만두고 싶어 할 것이다. 

 

어쩌면 관심을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리려는 성향을 사실 매우 자연스런 본능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그 어떤 다른 주제보다 그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대화할 때 말하는 시간의 약 60% 가량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쓴다고 한다. 게다가 나머지 40% 또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방이 아닌 제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쓴다. 

예를 들어 볼까?

당신의 동생이 자기가 만든 맛있는 저녁 식사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당신의 두뇌는 즉시 비슷한 경험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가 버섯에 대해 언급할 때, 당신의 뇌는 버섯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기억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손가락을 베었다고 이야기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뇌는 상처를 꿰메기 위해 응급실에 갔던 기억을 끄집어낼 것이다. 그런 뒤 당신의 뇌는 그 모든 기억을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당신이 '버섯은 맛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입은 침을 흘릴 것이고, 당신이 칼에 베인 손가락의 고통을 기억해낸다면, 당신의 손가락은 희미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이후 그 모든 감각 경험들은 다시 뇌로 되돌아와 한데 흡수되고 통합된다. 이 현상들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때로는 일이 잘못되기도 한다. 동생이 이야기한것과 내 경험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동생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내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행동 전문가인 주디스 마틴은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상대의 이야기와 당신 자신의 경험을 비교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려 든다.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전부라면, 당신은 마치 상대가 당신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다! 따라서 당신 자신의 경험에 문의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력은 대화를 나누기 직전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가 동시에 같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친구의 기분을 판단하기 위한 척도로 당신 자신의 기분을 활용하는 것은 꽤나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의 친구만 해고를 당하고, 당신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좋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파트너의 부정적 경험을 실제보다 덜 심각하게 평가한다. 반면, 방금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파트너의 긍정적 경험을 실제보다 덜 좋게 평가한다.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본능을 줄이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친구와 40분여간 긴 통화를 끝냈을 무렵 친구가 말했다.

"조언 고마워. 네 덕분에 문제가 조금 해결된 것 같아."

조언이라니? 사실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 "힘들었겠구나", "참 안타깝다"와 같은 대답들 뿐이었다.

친구에게 필요했던 건 내 조언이나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화란 주고 받는 것이다

꼭 말일 필요는 없다. 눈빛만으로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표정만으로도 상대에게 나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따. 함께 웃음으로써 기쁨을 공유할 수 있고, 함께 울면서 슬품을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순간에는 말이 필요하다. 상대가 잘못된 판단에 따라 잘못된 행돌을 하려고 할 때는 말로 설득할 필요가 있다.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 상대의 말에 공감해 주기 위해 굳이 내 얘기를 꺼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공감력을 발휘한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가 카토는 말했다.

"나는 말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보다 좋다는 확신이 들때에만 말한다."

 


입은 다물되 귀는 열어두라